2018년 4월 8일 일요일

그대가 내곁을 스쳐 지나가면...

조용히 기다려라.

그리고 희망없이 기다려라.

왜냐하면 희망은 그릇된 것에 대한 희망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없이 기다려라.

왜냐하면 사랑도

그릇된 사랑에 대한 사랑일 것이기 때문이다.


T.S. 엘리어트 / 네 개의 사중주



컵 하나엔 언젠나 한 잔의 커피만을 담을 수 있다

우리가 몸서리치며 어금니 꽉 깨물고 살아도

욕심뿐 결국 일인분의 삶이다

컵에 조금은 덜 가득하게 담아야 마시기 좋듯이

우리의 삶도 조금은 부족한 듯이 살아가야 숨쉬며 살 수 있다


용혜원




아침마다 서둘러 출근을 하지만 그림자는 집에 있다

그를 두고 나오는 날이 계속되고

거리에서 나는 활짝 웃는다

그림자 없이도 웃는 법을 익힌 뒤로는

내 등뒤에 그림자가 없다는 걸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

집에서 혼자 밥 말아 먹고 있을 그림자

그림자 없이도 밥 먹는 법을 익힌 뒤로는

내가 홑젓가락을 들고 있다는 걸 마주 앉은 사람도 알지 못한다

어느 저녁 집에 돌아와보니 그림자가 없다

안방에도 서재에도 베란다에도 화장실에도 없다

겨울날에 외투도 입지 않고 어디로 갔을까

신발도 없이 어디로 갔을까

어둠 속에 우두커니 앉아 그림자를 기다린다

그가 나를 오래 기다렸던 것처럼..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다 / 나희덕




길을 가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그대가 내 곁을 스쳐가면 어떻게 할까

모르는 척 아닌 척 지나쳐도

몇 걸음 못가서 뒤돌아 보게 되고

울컥 달려나온 그리움 때문에 눈물부터 고이겠지

아니야 돌아설 수 없어

꾹 참고 가던 길을 가야해

이 만큼 지내왔는데

돌아 서면 꽃이지듯 그대 모습 지워질지 모르잖아

준비없는 마음에

갑자기 쏟아진 그리움 때문에

다시 담을 수도 없고

아프긴 해도 오랫동안

사랑으로 머물 수도 있도록

지금처럼 그리움을 담고 지내야겠어

사랑하지만 만날 수 없는 그대는

내 하루를 여는 소중한 열쇠니까..


그대가 내 곁을 스쳐 지나면 / 윤보영




사람들은..

자기가 상대방에게 싫증이 났기때문에 혹은, 자기 의지로

또 혹은 상대방의 의지로 헤어졌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

계절이 바뀌듯 만남의 시기가 끝나는 것이다.

그저 그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면

마지막이 오는 그날까지 재미있게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


요시모토 바나나 / 하이보이드 하드 럭

댓글 없음:

댓글 쓰기